편집자는 다만 거들 뿐 - 사랑 좀 해본 편집자의 기획 일지 #2 :: 2010/06/15 14:11
그렇다. 이것은 굴욕이다. 히스 레저의 사진을 잭 니콜슨에게 내밀어 사인을 해달라니. 저 눈빛을 보라. 그러나 굴욕감을 느낀 게 잭 니콜슨뿐이었을까. 저 사진과 펜을 내민 저 저 사람, 저 사람도 집에 가서 엉엉 울었을지도 모른다. 아, 잭 니콜슨과 히스 레저를 구분하지 못하고 들이미는 엄청난 실수를 하다니 하면서 엉엉 울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저 사진의 ‘손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을 하고 손발이 오그라든 이유도 편집자 일을 하면서 제안의 과정 속에서 실수를 종종 하기 때문이다. 주전공이 전혀 다른 분야인 사람에게 이런 거 써보면 어떨까요 제안을 하기도 했다. 그분의 포지션과 강점이 A인데 시장에서 원하는 게 B니 거기에 맞게 써달라 되도 않는 제안을 하기도 한다(그럼 B처럼 쓸 수 있는 사람을 찾으면 될 일이 아닌가. 게으른 탓일 테다).
첫 책의 쌉싸롬한 기억
첫 책을 만들 때는 특히 중요한 실수가 많았다. 문제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교정 문제. 저자는 나름 자기만의 문체가 있는데 비문이라면 고치겠지만 그런 것도 아닌데 문장에 일일이 손대는 것을 거부했다. 나중에야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요즘엔 편집자들마다 말랑말랑하게 써달라고 조르는데, 저자에 맞게 잘 포장해서 내는 게 아니라 모든 저자를 한 가지 틀에 맞춰서 책을 만드는 걸 보니 참, 놀랍다.”
더 중요한 문제는 구성이었다. 사실 그 책은 원고가 거의 완성된 상태에서 계약을 했다. 그런데 시의성 있는 내용인데다 저자의 지명도도 있으니 현실 경제 문제를 비판하는 원래 원고에 경제학 용어 설명이나 경제학 이론을 덧붙이면 좋겠다는 의견. 그러나 저자 입장에서 그것은 군더더기일 뿐이라며며 반대했다. 결국은 저자가 원하는 방향대로 진행이 되긴 했으나 저자도 심기가 불편하고 편집자도 일정과 상황에 밀려 지고 들어갔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치 않은 상태에서 책이 나오게 되었다.
책이 잘 나오고 안 나오고를 떠나서 그 사람이 할 수 없는 것, 하기 싫은 것을 권하는 일은 고역이고 또한 무례함, 무지함이다. 그것이 특히 어떤 기준을 정해놓고 그 사람을 내 기준에 끼워 맞추려 할 때 더더욱 슬픈 일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랑을 할 때 더욱 크게 드러난다.
사랑은 독립성에 관한 상호동의이다
사랑에 관한 개똥철학은 무수히 많지만, 미처 사랑을 해보기도 전에 꽂혔던 말이 있다. 대학교 1학년 때 학교 중앙도서관을 기웃거리다 어느 서가에서 발견한 프랑스 소설에서였다. 68세대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었는데 제목도, 작가도 기억나지 않지만 첫 문장만은 아직 선명하다. “사랑은 서로의 독립성에 관한 상호동의이다.” 사랑이라 함은 자고로 말랑말랑하고 몽글몽글한 말들이어야 하는데 독립, 상호, 동의라는 말로도 정의할 수 있구나, 우와. 괜히 멋져 보였다. 그러나 폼이라도 잡으려고 “이 말 멋있지 않냐?”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꺼내면 십중팔구 “그럴 거면 뭐하러 사귀냐. 놔주지” 하는 대답이 돌아오게 마련이다. 사랑을 하되 독립성을 인정하기. 참 어려운 일이다.
결혼을 하고 보니 그게 가능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를테면 이런 거다. 색시에게 얼마 전에 더 재미있는 일을 하는 회사에서 더 좋은 조건에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다. 걱정거리는 지금보다 더 바빠질게 뻔하다는 것. 안 그래도 주중에는 자는 시간 외에는 일만 하는데 더더욱 여유는 사라지겠구나. 둘이 소맥을 말아 마시며 했던 고민의 요체는 그것이었다.
나나 그분이나 각자 한두 번씩 정말 하기 싫은 일을 피해, 또는 더 잘할 수 있는 일을 택하기 위해 인생 경로를 뒤튼 경험이 있었다. 그때마다 서로 말린 적은 없었다. “더 재밌을 것 같아?”, “잘할 수 있을 것 같아?” 따위를 묻고 답이 예스라면 재밌을 거라는데, 하고 싶다는데 말릴 이유는 딱히 없었다. 하고 싶은데 못하는 것은 당사자가 감내해야 하는 일이고 해야 하는데 못하는 것은 상대방에서 감당하고 대신 해주면 될 일이다. 상대방의 선택을 인정하는 것, 그것을 신뢰하는 것이 바로 독립성에 대한 동의가 아닐까.
편집자는 다만 거들 뿐
앞서 말한 책에서 실수했던 것도 바로 그 지점이었을 것이다. 내가 감당하지도 못할 거면서 더 잘 팔릴 수 있다는 기대로 이 사람이 왜 책을 쓰려 하는가, 이 책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부족했다. 최후의 기획자는 저자, 편집자는 슬램덩크의 명대사 “왼손은 다만 거들 뿐”이라는 말처럼 바로 그 왼손 역할에 충실하면 되는 것이다.
지금 만드는 책은 그런 실수를 피하려 애쓰는 중이다. ‘대한민국 20대에 관한 인류학적 보고서’라는 부제를 달고 집필 중인 책이다. 저자는 20대와 함께 공부하고 연구하고 활동하는 활동가 겸 학자다. 저자는 한 꼭지 한 꼭지 원고를 메일로 전송 중이다. 그러면 나는 꼭지마다 내가 생각하는 바를 정리해서 저자에게 전달하는 식으로 원고를 진행하고 있다. 그때마다 고민의 기준을 다시 되새긴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가 하려는 것에서 벗어나지는 않았는가.
*추신.
정신없는 일필휘지
용두사미 어리둥절
이건 무슨 글일까요
사죄하는 마음으로
시 한 수를 바칩니다
그의 행복을 기도드리는
신동엽
그의 행복을 기도드리는 유일한 사람이 되자.
그의 파랑새처럼 여린 목숨이 애쓰지 않고 살아가도록
길을 도와주는 머슴이 되자.
그는 살아가고 싶어서 심장이 팔뜨닥거리고 눈이 우물처럼
빛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나의 그림자도 아니며 없어질 실재도 아닌 것이다.
그는 저기 태양을 우러러 따라가는 해바라기와 같이 독립된
하나의 어여쁘고 싶은 목숨인 것이다.
어여쁘고 싶은 그의 목숨에 끄나풀이 되어선 못쓴다.
당길 힘이 없으면 끊어버리자.
그리하여 싶으도록 걸어가는 그의 검은 눈동자의 행복을
기도드리는 유일한 사람이 되자.
그는 다만 나와 인연이 있었던
어여쁘고 깨끗이 살아가고 싶어하는 정한 몸알일 따름.
그리하여 만에 혹 머언 훗날 나의 영역이 커져
그의 사는 세상까지 미치면 그때
순리로 합칠 날 있을지도 모를 일일께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