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정보는 고양이를 만나다 - 나를 사로잡은 문장들 #1 :: 2010/06/18 11:48

#1. 교정보는 고양이를 만나다

 “주인님, 많이 피곤하신 모양입니다. 펜을 내려놓고 이제 잠자리에 드시지요.”
 “아, 안 돼……내일까지 교정을 다 봐야 하는데, 음냐.”
 고 군이 우리 집에 나타난 것은 삼 주 전이었다. 빨간색 펜을 꼭 붙들고 침대 위에서 침을 흘리며 자던 나는 사각사각 글씨 소리에 부스스 잠을 깼다.
 내 책상 앞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팔 토시까지 끼고 반듯한 자세로 앉아 교정을 보고 있는 늘씬한 뒷모습. 그런데 의자 뒤편으로 무언가가 비죽이 나와 있다. 저것은…… 꼬리? 순간 그가 고개를 돌렸다. 헉, 고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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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셨습니까, 주인님?”
 주인님? 그는 안경을 벗고 팔 토시까지 벗어 책상 위에 올려놓더니 공손히 인사를 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주인님의 부름을 받고 이곳에 찾아왔습니다.”
 “나 부른 적 없는데…….”
 “부르셨습니다. 그것도 서른세 번이나요. 교정지에 흘린 침에 펜글씨가 번져서 에메랄드빛을 띠게 되면 저희 편사고(편집자를 사랑하는 고양이 모임)로 신호가 옵니다. 피곤에 지쳐 책에 대한 사랑이 식어버린 편집자를 회복시키는 것이 저희의 모토입니다.”
 “그러니까 날 위해 뭔가를 해주는 거예요?”
 “네. 먼저 주인님의 어린 시절 외로움을 달래주었던 책들을 찾아 여행을 떠날 겁니다. 저는 스캣포드에서 독서치료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블라블라블라).”

 “잠깐만!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은데, 난 바쁘다구요! 이번 주까지 봐야 할 교정지도 있고.”
 “그건, 염려 마세요. 저로 말할 것 같으면 '교정보는 고양이' 2등상을 수상한 전력이 있지요. 그러니 일 걱정은 하지 마시고, 저만 믿고 따라오시면 됩니다. 주인님에게 따뜻한 기억을 심어주었던 책들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라니, 생각만 해도 신나지 않으세요?”
 고양이의 눈에 별이 한가득 채워졌다.
 “자, 먼저 여기 족욕을 위한 물을 떠다놓았으니 발을 담그세요.”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내 앞에 놓인 대야에 발을 넣었다. 뭐, 꿈이라고 해도 별로 나쁘지 않은데…….
 “아 뭐라고 부르면 되죠, 고양이... 군?”
 “고 군이라고 불러주세요, 심플하게. 앞으로 더 이상 외롭게 잠드시는 일은 없을 거예요.”
 고 군은 은색 수염을 매만지며 결연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대야 속 따뜻한 물의 온기가 발을 통해 몸 전체에 퍼지자 나는 최면에 걸린 듯 잠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주인님, 눈을 뜨세요.”
 고 군의 속삭임에 나는 눈을 떴다.
 앗, 여기는 나의 중학교 시절 도서실. 국어부장이라는 이유로 도서실 열쇠를 맡아서, 점심시간마다 숨어들던 곳이다. 헤르만 헤세, 루이제 린저 등의 책들이 가지런히 꽂혀 있는 먼지 쌓인 서가에서 보내는 나만의 시간은 정말 충만했다. 사교적인 성격이 못 되던 나는 거기서 책을 읽고, 과제를 하고, 편지를 쓰고, 로맨스소설 따위를 끼적였다. 물론 나는 왜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친해지지 못할까, 고민도 수없이 하면서.(잠시 내성적인 사람들의 변을 해보자면, 이들에겐 자신만의 세계가 너무 크다, 한마디로 자의식이 넘친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에 대한 관심도 지대하다, 한마디로 다른 사람도 엄청 의식한다. 그러다 보면 나의 세계와 그들의 세계를 이해하는 사이 그만 쉬이 지쳐버리고 만다. 서로간의 커뮤니케이션이 진행되어야 할 순간에, 지금 나의 상태와 감정과 생각과, 그쪽의 상태와 감정과 생각을 헤아리다가 그만 패닉에 빠진다. 그리고 아, 이런 소모적인 건 싫어, 이러느니 혼자 있을래, 라는 선언과 함께 시작되는 외로움의 악순환.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성적인 사람들의 수줍음을 사랑한다. 그들은 쉽게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않고, 단정하지 않고, 가르치려 들지 않는다. 대신 자기에게 돌아가 그 순간의 자신이 어떤 생각들을 하고 있었는지를 찬찬히 돌아본다. 서툴지만 예쁜 사람들…….)

 암튼 본론으로 돌아와서 그렇게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던 내게 책은 어떤 말을 걸었던가?
 아아. 그냥 조용히 내가 읽어주길 기다리며 자신의 몸을 내보이던 그 사랑스러운 속살을 기억한다. 강요하지 않는다. 그냥 한 자 한 자를 안고 내 앞에 있을 뿐이다. 첫사랑은 고등학교 때였던 것 같다. 역시 도서실에서 단짝 친구와 수학 정석을 앞에 둔 채 흥분한 목소리로 외치던 내 모습이 생생히 기억난다.
 “나의 마에카와 다다시를 찾았어!”
 ‘마에카와 다다시’는 《길은 여기에》(《빙점》의 작가인 미우라 아야코의 자전 에세이)에 등장하는 저자의 소꼽친구 이름이었다. 초등학교 교사로서 일본의 가치들을 아이들에게 열정적으로 전달하며 살던 저자 아야코가, 패전을 맞으면서 자신이 믿던 모든 것이 순식간에 무너지는 경험을 하고, 폐결핵에 걸려 요양 생활을 하던 13년의 기억을 담은 책이다. 허무주의에 빠져 자신을 방치한 채 남성들과 문란한 관계를 갖기도 하고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던 그녀에게 초등학교 동창인 마에카와 다다시가 찾아온다. 이성으로서가 아니라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역시 같은 병을 앓고 있던 그는 자신이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하고 저자와 연인 관계를 꿈꾸지 않는다), 저자가 자신의 존재를 받아들이고 '자신의 길'을 발견하길 원했던 그의 진심이 엿보이는 편지 한 구절에 나는 보라색 볼펜으로 밑줄을 그어놓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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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지하게 살려고 하지 않는 사람을 보는 건 참으로 쓸쓸한 일이지요.
그것이 설사 아야짱이 아니더라도 쓸쓸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뭐 이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그의 헌신적인 노력에도 저자는 일관되게 신을 조롱하고 늘 죽음을 꿈꾸지만, 어느 날 춘광대에서 자신의 한계를 절감하며 자기 발을 돌로 내려치는 그의 모습에 충격을 받는다.
 “아야짱, 그렇게 살다간 당신은 죽고 말아.”
 저자는 멍해져서 땅 밑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열심히 어딘가를 향해 먹이를 나르는 개미를 본다. 그리고 발견한다.
 ‘이 개미에겐 목적이 있다.’
 문득 마음이 쓸쓸해졌지만, 그녀의 가슴속에는 조용한 의지가 샘솟는다.
 ‘속았다 생각하고 이 사람이 사는 방식을 따라가 볼까?’
 춘광대의 그 장면으로 인해 저자가 어떤 빛을 발견했듯이 나 역시 그러했다. 대학에 떨어진 후 안 그래도 내성적이었던 나는 더욱더 사람을 사귀는 것에 두려움을 갖게 되었지만, 이 책을 통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어떤 끈을 보게 되었다. 이후 “배우고 싶다고 생각하는 소녀와 가르치고 싶다고 생각하는 청년의 만남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다”는 릴케의 말을 연애의 신조로 생각했으며, 종교를 가지게 되었다. 그때 내가 동경하던 현실의 마에카와 다다시는 선교사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나에게 빛을 보여줄 책들을 찾아다니며 이렇게 편집자로 살고 있다.

 “주인님의 마에카와 다다시는 그 후로 만나보셨나요?”
 고 군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분은 벌써 결혼을 하셨지. 근데 고 군은 중매도 하나봐?"
 "아, 주인님의 외로움을 달래드릴 방법을 찾는 게 저의 역할이니까요. 심신의 회복을 위해서는…….”
 “아, 고 군. 심신의 회복도 좋은데 어제 그 교정 끝내놓았어?”
 “네네. 다 끝나갑니다~”
 고 군은 팔 토시를 끼더니 의자 위로 올라앉았다.


카스테라님의 <외로워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 나를 사로잡은 문장들>
교정보는 고양이를 만나다
고양이 수첩
감정을 정리하는 어떤 방법에 관하여

2010/06/18 11:48 2010/06/18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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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크눌프 | 2010/06/22 09:37 | PERMALINK | EDIT/DEL | REPLY

    그렇게 고양이를 키우고 싶어 하시더니만, 그 이유가... ㅋ

  • 토트 | 2010/06/22 09:51 | PERMALINK | EDIT/DEL | REPLY

    갑자기 회사에 몽돌이와 고양이를 같이 키우고 싶은 생각이...^^
    고양이 삽화는 이재현 팀장님의 작품이에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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