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수첩 - 나를 사로잡은 문장들 #2 :: 2010/06/25 11:12

#2. 고양이 수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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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뭘 보고 있는 거야? 눈은 충혈돼 가지고…….”
 고 군이 쑥스러운 듯 교정지 아래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오드리 헵번? 고양이도 이런 걸 좋아한달 말야?”
 “예전 주인님이 밤마다 <티파니에서 아침을>을 보셨거든요…….”
 “창가에서 기타 치며 <문 리버> 부르던 헵번은 정말 근사했지? 근데 전 주인은 어떤 사람?”
 “아주 활발한 남자 분이었어요. 새로운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고, 한번 책 얘기를 시작하시면 끝날 줄을 몰랐죠.”
 “흠, 고 군은 나 말고도 주인이 여럿 있었지, 난 고양이라곤 고 군이 처음인데 말야. 왠지 기분이…….”
 “하지만 지금 저의 주인님은 카스테라 님이니까요. 그렇게 서운해하실 건…….”
 그렇게 말하는 고 군의 입 주위가 살짝 씰룩거렸다. 왠지 좋아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런데 말야, 오늘은 고 군이 좋아하는 책 이야기를 들려주는 건 어때?”
 “하지만 제가 여기 온 건,”
 “그러니까 내가 회복되기 위해선 고 군의 이야기가 필요하다구.”
 나는 음흉하게 씨익 웃었다.
 “아, 그러시다면 잠시만요.”
 고 군이 테이블 옆의 보자기에서 수첩을 하나 꺼냈다.
 “제가 좋아하는 문장을 적어놓은 수첩입지요.”
 고 군의 얼굴에 자랑스러운 표정이 퍼져나갔다.
 “흠흠. 제가 읽어드리는 구절이 어느 책에서 나온 건지 알아맞히시면 계속 읽어드릴게요. 틀릴 경우 주인님 차례가 되는 거구요.”
 “그래, 읽어봐.”
 “신기해요. 어떤 음악을 들으면, 그 곳을 제게 처음 알려준 사람이 생각나요. 그것도 번번이요. 처음 가본 길, 처음 읽은 책도 마찬가지고요. 세상에 그런 게 있다는 걸 알려준 사람이 떠올라요. '이름을 알려준 사람의 이름'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건 사물에 영원히 달라붙어버리는 것 같아요.”
 “김애란, <너의 여름은 어떠니>.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라고.”
 “앗, 역시 주인님. 이번엔 좀 어려운 걸로.”
 “훗, 해보시지.”
 “이 거리는 아샤 라시스 거리라 불린다. 엔지니어인 그녀가 저자 속에 그 길을 놓았다.”
 “…….”
 “모르시겠어요?”
 “응…….”
 “발터 벤야민의 <일방통행로>에 나오는 구절이랍니다. 벤야민은 친구의 연인인 아샤를 흠모해서 이런 헌사를 바쳤어요. 정말 낭만적이지요?”

 ‘이런 유식한 고양이 같으니라고.’
 “좋아, 그럼 내 차례군. 난 고 군처럼 수첩이 없어서 정확히는 기억을 못 하는데, 정말 가슴이 저릿했던 한 문장이 있어. 두 명의 친구가 오랜만에 만났어. 기억이 안 나니 A와 B라고 할게. 아마 A의 직장으로 고향 친구인 B가 찾아와 오랜만에 재회한 상황이었던 것 같아. 둘은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고, A는 바빠 죽겠는데 이야기를 마친 B가 화장실에서 이를 닦는다고 하더니 아주 오래오래 칫솔질을 하는 거야. 잇몸 다 닳겠다, 짜증이 솟구친 A가 한마디 하자, B가 이렇게 대답해. '내가 이를 다 닦으면 너 갈 거잖아.' 그때 그 한 구절이 정말 어찌나 가슴에 콕 박히던지. 나도 그런 적이 있었거든. 대학 때 좋아하던 사람이 있었는데, 난 좀 외톨이였던 반면 그 친구는 인기도 많고 온갖 동아리 활동을 하며 대학생활을 즐기던 중이었지. 그 애가 한번 시간을 내서 만나면 나는 헤어질 시간을 늦추고 싶어서 괜히 무슨 할 말이 있는 양 우물쭈물하곤 했어. 자존심 때문에 나랑 더 있어달라곤 차마 말 못 하고 그냥 오래오래 시간을 끄는 거지. 느릿느릿 안녕을 고하려고.”
 “네, 저도 읽은 기억이 나요. 단편소설이었는데 신경숙 작가인가.”
 “딩동댕. 맞힌 걸로 할게. 사실 나도 소설 제목은 기억이 안 나거든. 고 군은 다독가구나.”
 “호홋, 뭘요. 그럼 주인님, 하나 더 부탁드려요.”
 “음. 그러고 보니 나도 최근에 다이어리에 적어놓은 구절이 있어. 잠시만…… 여기 있다.  ‘매그니토가 사악한 존재가 된 것은 오랫동안 슬픔과 증오에 휩싸여 살았던 결과입니다. (...) 그의 증오와 슬픔은 처음에는 정당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감정들에 영향을 미치는 '우리의 외부' 대상들이 어떤 것이라 할지라도, 중요한 건 결국 그 감정들이 우리의 '내면에 일으킨 결과입니다.’”
 “전혀 모르겠는데요. 철학책인 것 같은데…….”
 “응. 내가 최근에 교정보다가 적어놓은 거야. 내게 더할 수 없는 위안을 준 동시에 오랜 친구 하나를 잃게 한 구절이지…….”

 “이런 곳에 들어오려던 게 아니었어.”
 돌잔치로 주위가 떠들썩한 어느 레스토랑에서 그렇게 말하며 난색을 표하던 그 애의 얼굴이 기억난다. 난 뭐 별로 상관없어. 조용한 편보다는 그 편이 덜 어색하잖아.
 어쨌든 나는 타이밍을 맞추는 데는 쥐약이었다. 어쩌면 좋은 타이밍을 망치는 데 소질이 있는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고 상대와 나와의 간극을 메우기보다는, 직구를 던지고 게임을 끝내버리는 일방적인 사람에 가까웠던 것 같다. 나를 잘 아는 사람들조차 이런 내 모습에 종종 놀랄 정도로.
 그러면서도 한 가지 믿고 있는 표지 같은 게 있었다. 그즈음 나를 사로잡고 있는 어떤 것(어떤 문장, 어떤 음악, 어떤 장소……)에 반응하는 상대의 모습을 보며 조심스레 나와 맞는 사람인지 점쳐보는 습관. 그날 그 자리에서도 어김없이 내가 편집하던 철학책의 한 단락이  불쑥 튀어나왔다. 이런 상황에서 이건 좋지 않아. 마음속에서 그런 소리가 들렸지만 늦었다.
 “나 최근에 참 못나게 살았다. 그러니까 상황에 빠져 허우적대느라 내 앞에 혹은 주위에  기쁜 일이 생겨도 기뻐하지 못하고, 조금만 기대하지 않은 일이 생겨도 확 방어막을 쳐버려. 최근에 이런 글을 읽었어. 어떤 사람의 증오와 슬픔이 처음엔 아무리 정당했다 하더라도……중요한 건 결국 그 감정들이 우리 ‘내면에 일으킨’ 결과라는 것.’ 그러니까…….”

 개인적으로 이런저런 일들을 겪으며 마음고생을 하던 때였다. 한 번, 두 번, 세 번까지는 내게 닥친 일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려 발버둥을 치다가, 마지막 한 방이 왔을 때는 그러기도 싫을 정도가 되었다. 팔짱을 끼고 매섭게 세상을 노려보다가, 나동그라져 이내 손을 놓아버렸다. 내가 믿는 신에게 손 내밀 힘조차 없었다, 아니, 그러기 싫었다. 나를 사로잡은 감정은 점차 대상을 알 수 없는 분노로 변해서 나를 걱정하는 사람들에게까지 날을 세웠다. 삼십 넘어 이 무슨 사춘기인가.
 그런데 순전히 일로 만난 철학책 속의 한 구절이 가슴을 세차게 때렸다. 나의 슬픔이 아무리 정당한 것이라 할지라도, 결국 중요한 건 슬픔이 내 안에 들어와 일으킨 결과다. 그 문장이 바닥까지 내려갔던 나를 구원해주었던 것 같다.
 처음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야. 지금 그 슬픔이 너를 어떤 상태로 끌고 가고 있는지 눈을 똑바로 뜨고 봐야 해. 그런 일이 일어난 이유에 집착하는 건 멍청한 짓이야. 슬픔에게 먹히기 전에 빠져나와! 죽을 것 같아도……이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교정을 보는데 눈앞이 흐려졌다.

 떠들썩한 소음을 뒤로하고, 오랜 친구가 더는 친구가 아니었던 그날, 나는 작은 목소리로 나를 이해해달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말은, 전달되지 않았다.
 내가 전하려던 건 그게 아니었는데,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그 아이의 피로한 눈에서 나의 말이 그저 튕겨나가고 있는 것을 보며 나는 입을 다물었다.
 최악의 타이밍. 책에서 받은 위로는 책에서 끝내는 편이 좋다. 이해받지 못한, 공유되지 못한 소중한 감정은 이내 부끄러운 기억으로 남고 만다.
 우리는 서로의 힘든 상황을 알았다. 십오 년 동안 우리가 겪은 일들, 보이기 싫은 구석들을 보이고 이해하는 데 길들여져 있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서로의 스무 살만을 기억하고 있었다. 착하고 순수하고 상대를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아이, 장난기 많고 순정만화를 좋아하고 자신감이 충만한 아이. 하지만 이제 더는 그렇지 않다는 걸 서로 알았다. 머리가 굵어졌고, 세상을 보는 시선도, 살아가는 방식도 달라졌다. 
 그 레스토랑 앞을 지날 때마다 되묻곤 했다. 서로를 이해하지 못해도 순전한 눈빛으로 고개를 주억거리며 그저 들어주었다면 달라졌을까?

 “주인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어, 뭐라고?”
 “무슨 책인지 모르겠어요. 제목을 알려주세요. 궁금해서…….”
 “아, 그래. '스튜디오 필로, 철학이 젊음에 답하다'라는 책이야. 난 철학책이 머리가 아닌 내 삶으로 들어올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어.”

 “아, 네. 적어두겠습니다.”
 고 군은 고양이 수첩에 연필로 꾹꾹 눌러 책 제목을 적었다.
 고 군, 네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카스테라님의 <외로워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 나를 사로잡은 문장들>
교정보는 고양이를 만나다
고양이 수첩
감정을 정리하는 어떤 방법에 관하여

2010/06/25 11:12 2010/06/25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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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도비만 | 2010/06/25 16:32 | PERMALINK | EDIT/DEL | REPLY

    제가 일방통행로에서 꽂혔던 말은,

    이별을 고하는 사람이 [이별을 전해 듣는 사람보다]
    얼마나 더 쉽게 사랑받는가!
    멀어져 가는 자에 대해 [감정의] 불꽃이 보다 순수하게 타오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왜 벤야민에게서 이런 말만을 기억하는 건가요?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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