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날의 곰스크를 좋아하세요? - 사랑 좀 해본 편집자의 기획 일지 #3 :: 2010/07/12 17:12
곰스크를 아시나요
“나는 아직도 곰스크로 가는 기차표를 사기 위해 돈을 모으고 있다”라는 말로 끝을 맺는 짧은 글이 있다. 제목도 <곰스크로 가는 기차>인 이 글은 독일사람 원작이다. 청소년 철학 교양으로 잘 알려진 안광복이 PC통신 시절에 번역해서 알렸다. 황경신은 이를 액자소설식으로 바꾸어 <페이퍼>에 실었다. 나는 군대 시절 한 후배가 그 <페이퍼>를 곱게 접어 보내준 덕분에 읽게 되었다. 많이 돌고 돌아 나에게도 왔다.
곰스크로 향하는 길, 잠시 머물려 했던 간이역에서 기차를 놓치고 그곳에 눌러 앉게 된 부부. 돈만 모이면, 조금만 상황이 나아지면 곰스크로 가리라 다짐하는 남편과 이곳도 좋으니 그곳엘 굳이 가야 하느냐는 부인. 그리고 황경신의 글에서 이 부부의 이야기를 듣고 들려주며 자신들의 삶을 반추하는 청춘을 함께 보낸 한 남자와 여자.
(“더 이상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수많은 블로그로 확인할 수 있다).
곰스크를 향하는 것도, 지금의 그곳에 머무르는 것도 모두 둘의 선택이고 둘의 책임이다. 다만 둘의 생각이 달랐을 뿐일 것이다. 20대의 중간쯤에 이 글을 읽었을 때와 본격적으로 밥벌이란 것을 하고 나서, 그리고 그 글을 처음 읽은 뒤로 10년이 지난 지금 저마다 다른 느낌이 든다. 왜 곰스크로 떠나지 못했는가 남자를 비웃고 여자를 비난하던 때가 있었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있는 것 외에 더 무얼 바라고 더 먼 곳을 가야 하느냐 남자를 비난하던 때도 있었다. 그리고 반드시 그곳이어야만 가능한 일이란 없으니 현재에서 그곳을 만들자고 나름 희망적으로 생각하던 때도 있었다. 지금은 글쎄…….
버거웠으므로 벗어버렸던
감사팀. 이게 내 첫 직장에서 내가 속한 팀이었다. “쌩유 베리 감사!”는 아니고 회사가 잘 돌아가는지, 개선해야 할 일은 없는지를 조사하고 경영진에 보고하는 그런 일이었다. 감사라는 게 당연히 피감사 대상이 있어야 하고 그것은 전국의 공장, 연구소, 영업 지점이었으니 직접 가는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한 달의 3분의 2는 지방으로 출장을 다니고 나머지 시간에는 결과를 보고서로 정리하느라 야근하는 날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3년 반을 살던 중간에, 연애라는 것을 하게 되었다.
이분도 만만치 않아 직업은 간호사. 종합병원 간호사였으니 3교대. 게다가 생사를 넘나드는 환자들도 많고 긴박한 상황이 수없이 발생하는 신경외과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주중에 서울을 비우고 주말에만 시간이 나는데 이분은 또 주말에 3교대 중 시간이 애매하게 걸리면 얼굴을 볼 수 없는 노릇. 드문드문 만나며 지냈다.
대화라는 게 초반에는 가장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이야기부터 하게 마련이다. 그러다가 시간이 더 나고 대화량이 늘어나면 보다 본질에 가까운, 그러니까 서로에 대한 감정이니 앞으로 살아갈 날들에 대한 이야기도 풀리게 마련이다. 만나자마자 “넌 사랑을 믿니?” 이럴 수는 없으니까. 그러나 이런 ‘아다리’ 맞추기도 어려운 데이트 일정에서 하는 이야기란 먹고사는 일에 대한 것이다. ‘ㅇㅇ지점 감사를 갔는데 장부 조사하다 보니까 빼돌린 돈이 얼마라서 징계받았다’, ‘ㅇㅇㅇ호실 환자가 밤에 갑자기 발작을 일으켜 병동에 비상이 걸렸다.’ 이런 이야기를 하다가 ‘전주에 가면 어디어디에 콩나물국밥이 맛있더라’ 같은 되도 않는 이야기로 발전하기는 쉬워도 진솔한 이야기를 풀어내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그땐 그랬다.
헤어졌다. 이맘때였다. 어느 날 역시 일주일치 출장을 다녀와 묵은 짐을 풀고 퍼졌다. 그분도 며칠의 야간근무를 마치고 자기 집으로 퇴근한 뒤였다. 통화를 하는데 갑자기 무기력해짐을 느꼈다. 더 이상 이 관계 무슨 의미가 있느냐 하는 그런 유. 그대로 좀 모진 방법으로 헤어지고 말았다. (지금 생각해도 내가 사람에게 한 가장 나쁜 짓 중 하나다.) 삶이 버겁다고 해야 하나. 왜 이러고 사나 싶기도 했고. 덜컥 겁이 났다. 아무튼 비겁한 것이었다. 사랑만 말하고 살아도 아까운 시절에 둘이 마주 앉아 영수증과 통장 잔고와 카드 명세서 등을 놓고 계산기를 두드리며 살아야 한다는 사실은 비극으로 여겨졌다.
나의 곰스크, 당신의 곰스크
작년 이맘 때 나는 결혼을 하여 본격 “영수증과 통장 잔고와 카드 명세서 등을 놓고 계산기를 두드려야 하는” 삶을 시작하였다. 수북이 쌓인 부부의 한 달치 술값의 증거들을 보며 반성회를 하다가, 조금씩 늘어가는 통장 잔고를 보며 각자의 위시리스트를 살~짝 프리젠테이션하기도 하는 그런 시절을 사는 것이다.
나는 곰스크 행을 포기한 여인과 같은 삶을 사는 것인가. 잘 팔리는 책을 연이어 내놓는 획기적인 편집자가 되어, 수입의 총량을 늘려 수입 대비 음주비 지출을 낮추는 획기적인 방법을 떠올리기도 한 것이 사실이다. 반대로 팍팍했던 감사팀 시절을 벗어나 일과 삶이 대체로 일치하는 삶을 살게 된 것이라 만족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바로 그맘때 만들기로 한 책들을 보니 지나간 연애와 곰스크와…… 그런 생각이 든 것이다. <팜 시티>. 시애틀의 슬럼에서 직접 벌을 치고 돼지를 기르는 사람의 에세이다. <콜드>. 지구가 얼마나 추운지 직접 경험해보겠다 북극 근처에서 1년을 산 어느 과학자의 에세이다. <최후의 모험가>도 이때 찾은 책이다. 열기구를 타고 세계일주를 하는 게 꿈인, 그러나 태평양 상공에서 실종된 모험가를 다룬 논픽션이다.
바로 그맘때 눈에 잘 띄지 않는 이런 책들이 눈에 들어온 건 나 역시 어떤 곰스크를 마음에 그리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저마다의 곰스크를 찾아 떠난 사람들, 저마다의 곰스크에 도착한 사람들. 그들을 지켜보리라 하는 마음. 그리고 그러그러한 마음이 들 때 이 책을 읽는다면 나의 곰스크는 어디에 있는가, 아니 너의 곰스크가 있었다는, 그곳을 바라고 그리워했던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고 다짐하리라는 마음 말이다. 당신도 그랬으면 좋겠다.
PS. 이 책들은 아직 출간하지 않았다. 퍼뜩 카테고리 이름은 <곰스크>라고 지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